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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9년. 이제야 그를 확신하다.

게재일 : 2009.07.12 (Sun) 01:46:50 AM

작성자 : 타버린 종이

No. 600878 추천수 : 18 조회수 : 852

블로그에 쓴걸 옮겨서 문체가 다르코마. 멘트 위주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후기야 ㅎㅎ
오늘 정말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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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9707번 버스의 창가 자리에서 젖은 빨래처럼 축 쳐져서 왔다. 대화역에서 가득 차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각자 방금 끝난 공연의 뒷맛을 음미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젖어도 상관없을 만큼만의 비가 창 밖으로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곡 아침의 눈은 첫번째 비가 오는날 노란 우산을 활짝 펴고 한 번만 운다고 했는데. 거대한 킨텍스에서 인파들 속에서 홀로 빠져나오며 내 우산이 노란 우산이면 좋았을걸..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9년만에 태지를 보았다. 2000년 크리스마스. 88체육관에서 있었던 그 공연에 나는 혼자 서 있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면서 버스를 타고 88 체육관으로 갔었다. 그 때 스쳐지나갔던 풍경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9700번 버스를 타고, 옆자리에는 태지의 휴먼드림 시계와 나와 같은 영상폰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 앉았있었던 오늘의 풍경과 겹쳤다.

그날, 공연장에 도착한 나는 한가지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제일은행에서 받아온 내 표에는 다른 사람들 표에는 다 찍혀 있었던 도장이 없었다. 당시 중2였던 나 대신 엄마와 아빠가 다른 동네에 있는 제일은행에 차를 타고 가서 남은 것 한장을 어렵게 사온 표였다. 내 표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게 아닐까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물품보관소에 있던 사람좋게 생긴 아저씨에게 내 표를 보여주며 물어봤었다. 내 표를 본 그 분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표에 도장이 없으면 공연을 못 본다고 내게 말했다! 순간 나는 새파랗게 질렸던 것 같다.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을 내 인생에 처음 실감한 순간이었다. 굳어있는 나에게 그 분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괜찮다고 문제 없다고 말했다. 이날 태지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은 하나도 안나지만 이 해프닝만은 너무나 뚜렷이 기억이 난다. 아마도 전형적인 범생이처럼 생긴 통통한 여중생이 잔뜩 긴장해서 혼자 온 모습이 신기했던 것 같다. 나는 십년 감수했다.

킨텍스에 도착해서 팬들이 친절하게 붙여놓은 노란 종이 비행기가 인도하는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 종이 비행기가 없었다면 그 주변을 꽤나 헤맸을 것이다. 특히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길에 그 많은 노란 종이비행기를 킨텍스까지 연결해 놓은 모습은 정말로 감동적이었다. 킨텍스에 도착해서 우글거리는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며, 나는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가수가 정말 정말 팬도 많고 유명한 사람이란 것을 다시 실감했다. 나이대가 나이대인지라 내 주변에서 콘서트까지 다니면서 그에게 빠져있는 사람은 너무나 보기 힘들었기에, 때때로 나는 내가 마이너한 가수를 좋아한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렇게 덩어리 중의 하나가 되어 티켓교환처를 찾았다. A구역 1499번. A 구역 교환줄 끝에는 김실장님이 앉아계셨다. 아니 사장님이 여기서 뭐 하시는거야! 라고 생각했다. 티켓을 받는 한명한명에게 웃으시면서 공연 잘 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너무나 예의바른 학생 모드로 두 손으로 얌전히 팔찌를 받았다. 집에서 챙겨온 폐 휴대폰을 내고는 그동안 노리고 있었던 기타피크 목걸이를 사기위해 ETP SHOP으로 갔다. 그러나, ETP SHOP은 애저녁에 물품이 동나버렸고 나는 결국 물품보관소에 가방을 맡기고 R-237번 스티커를 받았다. 이후 입장이 시작될때까지 나는 그 주변을 배회했다. 팔찌는 일찌감치 손목에 감아버렸는데, 팔찌를 안차고 티켓과 함께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이거 혹시 팔찌 지금 차는거 아닌거 아냐?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사실, 별 상관 없는거였는데. 나는 항상 내가 공연을 제대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곤 했다. 이게 다 소심한 탓이다.

2000년, 나느 88체육관의 d구역 바리게이트를 잡고 태지를 보았다. 살아있는 태지가 아니라 거대한 스크린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가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까만 선글라스를 낀 그의 얼굴.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자기 생일이라고 배너를 흔드는 팬에게 "생일축하~"하면서 아주 귀엽게 손을 까딱거려 준 것. 바리게이트는 꽤나 밀렸기 때문에 슬램도 서핑도 사실상 불가능했었다. 그래도 얼마나 요동을 쳤는지 집에 돌아와보니 내 양쪽 무릎엔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며칠 전부터 나는 오늘의 콘서트, 특히 콘서트가 시작하는 첫 순간을 상상하면서 순간순간 심장이 떨린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정말 왔을 때. 난 다시 내 눈을 의심했다. 거대한 스크린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앞에서 틱탁을 부르고 있는 사람이 진짜 서태지인가? 그토록 내가 보고 싶어했던 그가 맞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쏜살겉이 3곡이 지나고 그가 인사했을때. 그리고 대화를 이어갈때 나는 왈칵 눈물이 나는 시린 순간을 경험했다. 정말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격. 그가 내 앞에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태지의 콘서트는 마지막엔 눈물을 펑펑 흘리고마는 콘서트였다. 그리움과 서러움과 애틋함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눈물들. 6집때부터 너무나 많이 보았던 모습이었다. 그때 태지는 카리스마 넘쳤지만 현실감이 부재했다. 그는 신기루같았다. 어린 마음에, 그는 나와 같은 현실속에 사는 사람같지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오늘은. 눈물도 없었고 가슴 아리는 이별도 없었다. 통곡과 서러움 대신 환희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아름다운 축제.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을 만큼 즐거운 공연이었다. 좋아서 입이 찢어진다는 걸 경험하고 평소 내 몸 같지 않게 미친듯이 뛸 수 있었다. 처음 게스트 공연때만 해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던 내 굳어버린 몸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때는 전주의 기타박자에 그대로 맞춰 펄쩍펄쩍 뛸만큼 훨훨 날았다.  즐거워 미쳐버릴 것 같은 열기 속에 그가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현실적으로 다가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팬들과 장난치고 함께 즐거워 웃는 그가 바로 내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까, 이따금씩 찾아오는 덩어리로서의 우울함은 이날만큼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내가 그를 그리워하며 만들었던 공허한 환상들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내 옆에서 노래하는 실체로서의 그가 남았다. 나는 이제 그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환상을 갖지도 않을거다. 그는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갈 것이고, 노래할 것이다. 나는 9년이 지난 오늘에야 이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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