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뮤지컬오덕의 입장에서 쓴 것이며, 저는 음악에 지극히 무지한 막귀 리스너임을 미리 밝힙니다.
세계 뮤지컬계를 단 한 사람으로 정리해야 한다면, 전 웨버를 말할 겁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이른바 세계4대 뮤지컬중 두 개의 뮤지컬을 작곡했으며(캣츠와 오페라의 유령) 수십년간 작품활동을 하며 끊임없이 창작물을 내놓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웨버옹의 작품빨이 좀 떨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만, 그건 제가 웨버옹의 활동 구역과 정반대에 살고 있고 모국어를 한국어로 사용하는 한국 사람이라 그럴지도 모르지요. 풍성하고 아름다우면서, 쉽게 기억되는 멜로디, 작품이 심심하더라도 한 곡만은 히트송을 만들어내는 저력, 방대한 작품량... 웨버옹의 장점은 상당히 많습니다. 게다가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틴을 맡았던 사라 브라이트만과의 결혼과 이혼으로 호사가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인생사까지두요.
한편에는, 손드하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암삼자들' 과 '스위니 토드' 라는 두 작품이 라이센스로 올라갔던 작곡가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메가히트를 기록하며 세계 몇 대 뮤지컬에 이름을 올리는 작품을 뽑아내지는 않습니다만(전 손드하임이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뮤지컬 오덕들에게 매니악한 인기를 얻고 있는 작곡가지요. 물론 모든 뮤지컬 오덕들이 손드하임을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태지라는 음악인이 추구하는 노선은 웨버와 손드하임이라는 선택지라면, 손드하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정교하게 배치된 음, 인물의 감정과 연기톤까지 고스란히 노래로 옮겨놓는 작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손드하임의 작품을 연기했던 배우 홍지민씨는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박자가 바뀌고, 호흡이 중요해서 만약 내가 한 템포만 박자를 놓쳐도 노래를 부를 수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짜여진 곡이다' 라구요. 또한 같은 작품에 출연했던 류정한씨는 이런 인터뷰를 했어요. '배우가 노래하면서 연기를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음 하나하나에 감정과 연기가 실려있어서 제대로 부르지 않으면 안되는 작품이다' 라구요.
이 인터뷰를 보면서 서태지라는 음악인을 생각했습니다. 늘 그랬지만, 이번 앨범을 들으면서 느낀 건 '정교하고 촘촘하다' 라는 인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글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숲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에 나무와 돌과 물의 위치를 잡고, 빛에 따라서 변화하는 물과 나뭇잎을 잡아내기 위해 이파리 하나, 물결 하나에 사흘밤을 꼬박새서 덧칠을 하는 그런 작업과정이, 눈앞에 그려진달까요. 언뜻 보면 '아, 시원하구나, 숲이구나, 예쁘구나' 하고 넘어가겠지만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에 붓질이 수백번씩 닿아있는, 그러나 전혀 무겁거나 어두워보이지 않는 맑은 느낌이요. 유화로 수채화에 가깝게 투명하게 그려낸 그림인데, 그 붓질이 탁하지 않은.
음표 하나를 다듬고 자기가 원하는 곳에 배치해서, 그 음을 자기가 원하는 느낌대로 뽑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 음을 잘 어울리게 하기 위해서, 아마 이 사람은 일주일씩 밤을 새는 건 예사였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이 음악은 그런 음악이에요. 적당히 전자음 좀 얹고, 리프 좀 따고, 훅 한 부분을 만들려고 하룻밤쯤 고민하는- 그렇게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기성품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심장에 직격하는 오트 쿠튀르죠. 숲을 보든, 나무를 보든, 물을 보든, 돌을 보든- 그림의 어느 부분만을 향유하더라도 충분히 아름답겠지만, 디테일을 세심히 살피고 전체적인 조망을 하면 그 감동은 배가 될 겁니다. 음을 배치하고, 그 음을 다듬어 노래를 짓고, 그 노래를 다시 배치하는 과정들도 세심하게 조율된 거니까요.
시각과 후각, 청각과 촉각, 공감각까지 자극하는 음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글도 희귀하지요. 이 뮤지션의 음악은 진공상태의 공간에 물이 흐르게 하고 눈이 내리게 하는 공간감을 줍니다. 물소리와 눈이 내리는 아침의 고요함, 바다냄새까지 느껴지는 음악인거죠. 하지만 그 물소리와 바다냄새는 진공공간에 서태지라는 음악인이 직접 만들어놓은, 한없이 인위적이면서 또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땡스투에서 그는 자신이 본 우주가 결국 거짓이라고 했지요.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대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전혀 새로운 세상, 그 세상에서 하늘이 흐르고 석류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완벽한 '이계'를 만들어낸 사람이 '그래도 이 건 마법, 현실이 아니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어떤 클래스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이렇게 경지에 오르나 봅니다.
|
|
함께해요
오늘의 최고 추천 게시물
오늘의 최고 조회 게시물
웨버와 손드하임, 그 어딘가의 서태지- 빛으로 음악을 그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