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8집은 서태지의 음악사에서 여러모로 흥미로운 앨범이다. 유례없이 긴 런닝타임, 솔로 이후 처음으로 브릿지 없는 구성,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싱글+본앨범 시도 등등. 그러나 특히 재미있는 것은 8집에서 거의 처음으로 -지금 떠오르는 다른 앨범 수록곡은 없음.. 9집의 숲속의 파이터 정도?- 공간/장소를 그려내는 노래들을 실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서태지 노래는 한 화자의 이야기를 따라가거나(예: 하여가) 외부적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거나(예: 시대유감) 둘 중 하나였고, 물리적 실체로서 공간/장소가 뚜렷하게 그려지는 노래는 많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 밤이 깊어가지만에서 카페라는 공간이 등장하긴 하나 순식간에 배경처리 될 뿐 이 카페가 어떤 카페인지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8집은 한 앨범에서 (적어도) 세 곡이나 공간/장소가 핵심이다. Moai, Juliet, 그리고 Coma가 그것인데, 아직 나의 내공이 그에 닿지 못하여 이 글에서는 Coma를 제외한 Moai와 Juliet만 다루도록 하겠다. Moai와 Juliet이 공간/장소를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1. Moai
Moai에서는 시종일관 두 공간이 대비된다. '네온사인 덫'이 환유하는 공간(아마도 도시)과 모아이 석상이 있는 이스터섬. 네온사인 덫의 공간은 '속된 마음'과 '세상에 찌든 시크함'의 공간이다. 이스터섬은 '낯선 시간들/길'에 '조각난 풍경'이 있는 공간이며, '산들바람' 속에서 '나른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네온사인이 어둠이 마땅할 때조차 어두울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라면, 이스터 섬은 '비로소 어둠을 허락'하는 곳이며 단지 작은 별빛만이 빛나는 곳이다.
이 곡에서 어둠은 완전히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화자가 보기에 밤엔 마땅히 어두워야 한다. 네온사인 덫의 공간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어둠 속에서 화자는 차가운 바닷속에 몸을 담그고 시크함과 속된 마음을 해체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이 끝나면 (=달이 질 무렵) 다시 맨발로 화자를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와 같은 식의 공간 대비 자체는 딱히 새로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도시vs시골, 본국vs이국의 대비는 흔하니까. 그러나 이 곡은 단지 두 공간의 비교대조를 넘어서서, A에서 B로 이동하는 그 행위 자체가 B라는 두번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다는 점이 보다 흥미롭다. 네온사인 덫에서 이스터섬으로 화자가 순간이동을 한 것이 아니다. 화자는 네온사인을 뒤로 등졌고, 벗어두고 온 날에 저항했으며, 변명의 노를 저어 이스터 섬에 닿았다. 즉, 굉장히 적극적으로 떠나는 동작을 통해 A에서 B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 이동의 행위 자체가 이스터 섬을 중요한 장소로 재맥락화한다. 등지고, 벗어두고, 노를 젓지 않았다면- 이스터섬에서 낯선 시간들은 화자에게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목적지 자체보다도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 방점이 찍히는 것은 순례와 많이 닮았고, 물길의 순례를 거쳐 당도한 이스터섬에서 차가운 바닷속에 몸을 담근 것은 정화의식에 닿아있다. (Moai에서의 바닷길 이동은 내게 사실 트로브리안드 섬으로 떠나던 말리노프스키를 연상시켰으나 이것은 직업병인 것 같으니 넘어가기로 하자.. 뱃길에서 말리노프스키가 온갖 상념에 젖어있던 그게 대체 무슨 글이었더라-_-a)
2. Juliet
Moai가 두 공간의 대비와 그 사이의 이동을 통해 모종의 의미를 획득했다면, Juliet은 철저하게 "애틋한 언덕"이라는 한 장소에 집중한다. 매우 구체적인 심상들을 통해서. 만약 내가 금손이었으면 Juliet의 '애틋한 언덕'을 한번쯤 그려보았을 것 같다. 이 공간은 "바람을 만끽"하고 "웃음소리가 울려퍼지고" "예쁜 목소리로 속삭여"주던 언덕이며, 두 연인의 사랑이 청각적 심상으로 그려지는 공간이다. 그와 동시에 언덕도 파랗고 별도 파란, 청색의 공간이기도 하다. 심상이 상당히 제한되고 집중되어 있다. 게다가 노래는 언덕을 벗어나지 않는다. Moai처럼 이동하는 행위는 당연히 없다. 화자는 철저히 언덕 붙박이이다. 무언가가 움직인다 해도 파란 별들이 '하늘 위로' -그래서 화자의 이동 없이도 볼 수 있게- 올라갔을 뿐. (단지 수직의 움직임만이 노래 전체를 지배하는 곡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Replica.)
Moai의 이스터 섬이 공간 이동의 행위를 거쳐 화자가 다시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장소였다면, Juliet의 언덕은 두 연인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는 등의 행위를 통해 물리적(배경적) 공간이 둘만의 의미있는 장소로 변환된다. 즉 전자는 대비되는 두 공간 사이를 옮겨감으로써 화자의 속성이 변화하고, 후자는 하나의 공간에서 화자의 행위/추억을 통해 공간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Juliet의 두 연인의 감정은 어차피 언어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차라리 화자는 둘만의 웜홀인 언덕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고자 하였을 것이며 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 발매된지 8년이 지난 앨범을 왜 뜬금없이 갑툭튀 리뷰하느냐 묻는다면... 명작은 두고두고 곱씹어야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 ")
+Coma가 빠진 이유는... 8집의 공간성/장소성에 대해 한 서저씨와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 분은 Coma를 무장소성(placeless) 내지는 장소상실의 강력한 예제라고 보았으나 내가 아직 거기에 동의가 되지 않아서... 좀 더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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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8집이 공간/장소를 그려내는 두 가지 방식: Moai와 Juli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