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밤은 깜깜했습니다.
청주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제천으로, 그리고 다시 제천에서 청주로 돌아가는 길..
깜깜한 밤, 달리는 차를 반겨주는 건 오직 가로등인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순간 입에서 흘러나왔어요.
"예쁘다!”
그 길을 한두 번 오고간 게 아닌데 저는 그 날 처음 적막을 밝혀주는 일렬로 선 가로등을 보았어요. 아니, 인지한 거죠. 부산 공연이 있었던 2월의 어느 날.
흐려지는 기억 속이지만, 아마 현진씨의 소격동 앞부분 솔로를 두 번째 들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핸드싱크가 아니라며, 처음으로 소격동 앞부분 드럼 솔로를 들려주던 날을 기억합니다.
아, 참 소리가 예쁘다는 생각 이전에 제 시선을 강탈했던 동그란 점, 점, 점..
현진씨가 소격동 드럼을 건드리면 그 자극을 받은 작은 빛이 스크린에 피어올랐어요, 하나.. 두울..
그리고 쫓아 올새라 공기 속으로 소리가 파고들었죠.. 따란.딴.딴.딴.딴.딴.
하나둘 피어오르던 빛은 소리가 되었고 그 소리는 우리에게 다시 자극을 준 듯,
내 맘 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 같았어요.
눈을 떴더니 사라져버린 소격동을 거닐던 어른 태지에게 있었을 이야기..
공연장에서 소격동을 들으며, 보며, 느끼며, 그 곳에 서 있던 이들이 새로 만들었을 이야기들..
십년이 넘게 지났던 도로에서 처음으로 ‘밤 안의 가로등’의 아름다움을 느낀 것 역시
‘콰이엇 나잇’이라는 공연에 서 있었던 나라는 사람이 새로이 만든 하나의 이야기겠죠..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된다는 시에서처럼..
참 여러 번 언급했고,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 기억할만한 ‘기운(에너지)’이 있어요.
2008년 ETP에서의 서태지 등장 전의 기운이죠.
그곳에 있었던 여러 서빠들의 증언이니 저만의 착각은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어요.’ 그때..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그 무엇도 아니지만, 7년이 지난 지금도 제게 생생히 남아있는 기운..
아마 ‘빛이 소리가 되는’ 소격동을 처음 느꼈던 순간도, 깜깜한 밤 속의 가로등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아요.
아이유의 소리를 입었던 소격동, 기무사가 있었다던 소격동, 소녀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던 소격동...
수많은 소격동이 내 앞에 있었고 말을 걸어왔지만,
결국 태지가 내게 선사한, 내게 꽃이 된 소격동은 ‘소리가 되던 그 빛’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나쳐간 수많은 기억들, 어쩌면 금방 사라져버릴 것들..
잠들면 안돼요, 사라질테니까..
하지만 수많은 것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일지라도 한 발, 한 발 예쁘게 디자인해가며 살아가고 싶어요.
반짝이는 빛처럼, 소리처럼 예쁘게 기억하며..
저는 때론 태지가 부러워요..
어렸을 땐 나의 우상이었고 영웅이었죠. 존경스러운..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됐고,
태지도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을 뿐 쉽지 않은 세상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순간순간 부러워질 때가 있어요.
태지오빠도 나랑 똑같은, 아니 어쩌면 더 경직된 교육을 받았을 텐데..
태지오빠도 나보다 좀 더 이른 나이에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성공했을 뿐, 똑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한국인일 텐데..
그런데 태지는 여러모로 부럽고, 존경스럽죠..
소격동을 들으며 부러웠던 건, 여러 가지 감각을 잘 사용할 줄 안다는 점이에요..
드럼을 건드려 빛을 만들고, 그 빛으로 다시 소리를 만들어내어 감정을 전달해낸 형상화 작업은..
어쩌면 아티스트로서 당연한 것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역으로, 태지는 아티스트라는 걸 보여주는 실례가 될 수도 있겠죠..
태지가 하나하나 설명해줘도 사실 음악에 대해 잘 몰라요.
태지 음악을 공부하듯 참 많이 들었어도 태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일부만을 볼 수도 있죠..
하지만 내 삶 속에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꺼이 전해주고
그것으로 또 하루를 살아내게 하는 삶의 지혜를 주는 것만큼은 사실이에요.
그래서 소격동 드럼 솔로를 처음 듣던 그 날의 감정을 전하고 싶었는데.. 쉽진 않네요.
두 달이 지난 지금..
수첩에 적어 둔 ‘소리가 되는 빛’에 대한 기억도 그림처럼 남아 있을 뿐이지만
내 하루하루를 ‘빛’처럼 반짝이게 해 준 아티스트, 서태지씨에게 문득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졌어요.
빛을 소리로, 그리고 소리를 빛으로..
내 감각들을 깨워줘서 고마워요. ^^
덕분에 내린 비만큼이나 촉촉한 마음으로 한 달을 시작합니다.
행복한 만우절에
from **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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