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의 작품들을 따지는 데 있어 15주년 음반의 내용에 의지해서 쓸 수 밖에 없는 걸
이해하시라.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난 서태지 음반을 별로 사지 않았다. -_-;
(그러고 보면 그렇게 열광적으로 들은 것도 아니다 -_-;)
그 시절의 음반으로 구입한 건 고작해야
4집, 굿바이 베스트, 시대유감 싱글 음반 정도다. 그러고 보면 CD로 다 있네.
그래도 15주년의 리마스터링 음질 수준이 장난이 아니니 큰 불만 없이 오히려 만족스럽다. -_-
1집부터 7집까지 수십 개에 이르는 트랙을 볼륨 조절 없이 그대로 들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혜택인가.
더군다나 각 음원이 선명해지며 공간감까지 확 살아났으니(심지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4, 5집에 해당하는
트랙마저 그렇다), 이것들을 각 CD별로 따로 발매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뭐 하여간 이 포스트에서는 시시콜콜한 음악적 분석은 하지 않고, 오직 내 주관적인 기준으로 Best와 Worst를
선택하여 쓴다.
1집
Best - 환상 속의 그대
Worst -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1집 하면 대개 랩댄스 음악의 시초로 알려져 있는(사실일까? 모르겠다) <난 알아요>가 가장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 듣기에는 <환상 속의 그대>가 가장 끌리는 것 같다. 일관성을 잃지 않는 템포 감각 속에서 명확한
기승전결의 구도 그리고 필요할 때 놓치지 않고 제대로 때리는 확실한 훅, 이거야말로 댄스 음악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매력 포인트 아닌가. 그 점에서 <난 알아요>도 즐기는 데 충분한 곡이지만, 역시 <환상 속의 그대>
가 내뿜는 템포의 포스 앞에는 한수 아래인 것 같다.
Worst는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와 <이제는>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선자를 고르게 되었다. <이제는>
은 그 분위기부터 지금의 내 취향과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멜로디 면에서 왠지 미완성 곡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래도 나레이션의 비중이 큰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보다는 지루하지 않다. -_-; 양쪽 모두 잔잔한
발라드적인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는 곡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내 취향에 따른 선택이니까.
비록 Best는 아니지만 15주년에서 의외로 발견한 한 가지 보물은 <내 모든 것>이다. 15주년에 실린 게 Live
Mix 버전 뿐이라서 원곡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태지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 유독 독특한 느낌을
주는 곡이다. <난 알아요>나 <환상 속의 그대>에 비해 강렬한 인상은 없는 가벼운 댄스 음악이며 특히나
그 가사는 서태지의 어떤 노래보다도 사랑의 감정을 세련시키지 않고 가장 투박하게 표현한 것 같다. 물론
가벼운 댄스 곡으로서 완성도에는 별 하자가 없는 데다가 15년 전 음악이니 딱히 비판할 이유야 없다.
오히려 이 노래는 그런 투박한 면모로 인해 서태지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 나름 독특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아직 치기 어린, 사랑에 대해 다양한 상상을 하는 신인 가수로서 보여질 수 있는 신선한 면모랄까나.
이런 걸 15년 후에 새삼 발견하는 나도 참 희한하다.
2집
Best - 하여가
Worst - 수시아
역시 <하여가>는 그 때 신나게 즐겼고 지금 들어도 대단한 매력을 지닌 곡이라는 생각이다. 간주의 기타
솔로가 지닌 문제점 그리고 태평소 소리가 음악적으로 그렇게 융합된 것 같지 않고 추가적인 양념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런 면모들을 감안하고도 이 곡은 멜로디와 사운드 양면에서 리스너가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음악적으로 필요한 기본적인 기승전결의 흐름, 댄스 음악으로서 가지는 템포
감각과 훅 그리고 육중한 메탈 사운드가 합쳐진 양상 속에서 하나의 자연스럽고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흐름으로 5분 여의 시간을 채웠다는 점에서 분명 잘 만들어진 곡이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15주년
버전에서 기타 사운드의 볼륨 조절이 약간 어색하게 이루어진 듯한 부분이 간간히 나타난다는 사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미쳐 알아채지 못하고 놓친 부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Worst로 <수시아>를 꼽았는데, 사실 그 이유는 좀 애매하게도 지금 기준으로 다시 듣기에는 별로 끌리지
않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꺼리는 장르에 속하는 발라드 곡인 <너에게>는 솔직히 잘 만들어진
곡이고, 그렇다고 엄연히 보컬 버전이 있는 <우리들만의 추억> 연주곡을 내세우는 건 Worst의 취지에 맞지
않는 꼼수 같다. <수시아>가 딱히 못 만든 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로 하여금 거듭 듣게 만들 매력 포인트
역시 없다는 점에서 Worst로 집어내었다. <우리들만의 추억> 연주곡 버전 다음으로 안 듣는 곡임은 사실이다.
3집
Best - 내 맘이야
Worst - 발해를 꿈꾸며
사회적 메세지와 그에 걸맞는 중후한 사운드를 갖춘 타이틀 곡을 제치고 Best로 뽑힌 <내 맘이야>. 사실
<교실 이데아>를 고려해보았지만, 진심으로 가장 끌리는 곡은 역시 <내 맘이야>다. 3집 특유의 메탈 사운드에
신나는 달리는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지 맘대로 내뱉는, 논리성도 없고 명분도 없는 헛소리의 작렬은 그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대로다. 사랑은 지긋지긋하고 시사성도 싫다. 세상이 내세우는 이런저런 잣대에 맞춘
내러티브를 홱~하니 거부하고 그때그때 내 맘대로 지껄이는 소리만큼 즐거우면서 한편으로 아련한 게 어디
있는가. 물론 리스너로 하여금 그런 막장의 헛소리에 자연스럽게 휘말리게 하는 음악성이 있음도 무시할
수 없다.
<발해를 꿈꾸며>는 이전에 상당히 인상 깊게 즐겼던 곡이다. 통일과 평화를 외치는 전위적인 메세지와 메탈
사운드. 얼마나 폼 나는가. 한데 지금 들으니 왠지 그 메세지가 너무 무겁게 들려서 오히려 거부감이 생긴다.
통일의 당위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걸 외치는 메세지를 듣고 있으니 자기 모순의 죄책감이 더 든다.
거시적이면서도 생산적인 메세지를 즐거이 듣기에 난 너무 부패했다. -_-; 그래서 괜한 분노에 <아이들의
눈으로> 대신에 Worst로 꼽았다. 실제로 별로 듣지 않는 곡이다.
그나저나 이 3집 리마스터링은 정말 두드러지게 잘한 것 같다. 일렉 기타와 베이스 기타, 드럼 어느 한 쪽도
뒤떨어지거나 묻히지 않고 제 소리를 내면서 제대로 어우러진 메탈 사운드로 살려놓았다. 기타 사운드의
입자감이 정말 훌륭해서 4집보다 더 좋게 들린다. 게다가 굿바이 베스트 음반과 수준 차이가 커서 10여 년 전
선배인 베스트 음반이 안타깝게 여겨질 정도다. (사실 안 듣는다.)
4집
Best - 슬픈 아픔
Worst - Come Back Home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할 당시만 해도 사실 난 서태지의 은퇴가 무슨 큰 의의가 있는 건지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냥 이런 독특하고 멋진 음악이 있다는 것에 신났을 뿐. 그 땐 그랬다.
Best <슬픈 아픔>은 <필승>과 더불어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곡이다. 하지만 시적인 감미로움을 지닌
표현력으로 자기 고통과 연민을 부르는 <슬픈 아픔>만큼 진심으로 다가오는 곡은 없는 것 같다. <필승>
특유의 지르는 악과 그 의미의 아이러니함(결국 미치도록 사랑한단다)도 멋지지만, <슬픈 아픔>의 슬픔과
고통은 잡동사니에 휩싸여 과장된 고민을 했던 시절의 내 모습을 닮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진지하지만 그래도
뭔가 깊게 동감되는 부분이 있다. 결국 추억이다. 사람의 마음에 담기고 또한 그것을 끌어가는 건 추억이다.
<Come Back Home>을 꼽은 첫 번째 이유는 이게 힙합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Come Back
Home>과 더불어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이 두 곡이 Worst의 유력한 후보다. 내가 힙합을
좋아하지 않는 건 무슨 진지한 음악성의 기준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어떤
독특하거나 분명한 포인트를 느끼기 힘든 성향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힙합에게 무슨 죄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힙합을 싫어한다. -_-; 그 중에서 <Come Back Home>이 유독 더 싫은 건 그것이 가출 청소년에게 자꾸
집에 돌아오라는 긍정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라는 가사는 더욱
싫다. 그나마 그걸 부르던 시절에는 그래도 지금에 비해 경제적으로 호황이었다. "괜찮은 미래"는 무슨 쥐뿔
의. -_-; 그냥 "그들이 시키는대로" 움직여도 먹고 살까 말까 인데.
겸으로 하는 얘기로, 꼽은 Best와는 별개로 <시대유감>은 정말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곡이다. 사회에 대한
비판성의 인상을 가진 곡이지만, 좀더 자세히 들어보면 어떤 사회적 문제점을 개선하자는 미래성을 담은 게
아니라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는, 보다 파괴적이며 전위적인 성격의 음악이다. 대안과 밝은 미래상을 제시하는
대신 세상에 대한 은유적인 저주를 내뿜는 이 노래는 사실 시사적이라기보다는 주술적이다. 1996년 015B의
마지막 6집 음반이 SF적 테마로 독특한 입지를 가진다면, 이 <시대유감>은 전무후무한 저주적 감각으로
가득한 주술성의 입지를 가졌다. 오버그라운드 계에서 이런 독특하고도 파괴적인 테마를 내세울 뮤지션이
달리 누가 있는가.
5집
Best - Take One
Worst - Take Five
사실 이 음반은 Best와 Worst를 가리기가 가장 애매한 작품이다. 원체 짧은 러닝 타임에 각각의 독특한 인상을
가진 음악들로 빼곡히 차여 있으니, 누가 더 낫고 못 낫고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이 음반은 Take One
부터 Take Six까지 하나도 안 빼놓고 골고루 즐기고 있다. 가장 부담없이 즐길 수 있으면서 또한 그 독특한
개성과 함께 완성도를 갖춘 음악성을 하나라 놓쳐서는 안 될, 최고의 음반이니까.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그래도 <Take One>이 아닐까. 메탈 사운드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이끌면서도
메탈 특유의 중후함과 박력으로 계속적인 변화를 보이며 집중력을 잃지 않게 만든 이 곡은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다른 음반에서 찾을 수 없는 그 독특한 정서가 정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순전히 주관적인
생각에 이 곡은 정말 그 자체가 분명한 의의와 주체성을 가진 "One"이다. 나에게 있어 서태지에 대한 기억의
"One"은 바로 이 곡에 있다. 이 곡 하나만으로도 서태지가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될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곡들이 의미없는 건 절대로 아니고. ^^;
Worst로 <Take Five>를 꼽은 이유는, 쉽게 말해 다른 곡들에 비해 개성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랄한 분위기를 잘 살려 만든 곡이고 딱히 흠잡을 데 없이 신나게 즐길 수 있는 곡이지만, 솔직히 같은 음반의
나머지 곡들이 지닌 개성에 비한다면 약간 밀리는 감이 있다. 그렇다. Take 시리즈는 웬만한 완성도와 개성
없이는 튀기 힘든 빡센 세계다.
여담이지만, 이 음반 역시 리마스터링이 상당히 잘 이루어진 것 같다. 오리지날 그리고 재판 음반에 비해
사운드의 공간감이 두드러지고 특히 베이스 기타 라인이 매우 잘 살아났다. 카 오디오 정도의 조건에서
뚜렷하게 분리되던 베이스 기타 라인이 15주년 음반에서는 헤드폰으로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니,
리마스터링이 그저 음량 조절 수준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실 락 사운드 구성에 있어 서태지 최고의
매력 포인트는 바로 베이스 기타에 있지 않은가.
6집
Best - 울트라맨이야
Worst - 탱크
서태지 솔로 음반 중에서 내가 최악이라고 꼽는 6집 음반이지만, 사실 음악적으로 그렇게 나무랄 데가 없고
신나게 즐기는 데 별로 흠도 없는 음반이다. 내가 이 음반을 굳이 최악으로 꼽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탱크> 하나 때문이다. 속설대로 미국에서 철지난 뉴메탈의 일부 기류를 흉내낸 것 따위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특정 곡으로부터 모티브를 따왔다는 티는 분명 나지만 해당 곡과 비교해도 충분히 구분되는 사운드를
가졌으니까.
문제는 개인적인 취향의 기준이다. 지루한 것이다. 거친 사운드와 서태지의 보컬 그리고 가사는 나름
어울리지만 그럼에도 처음부터 쏟아내는 포스가 뒤로 갈수록 질질 끌리며 왠지 밋밋해지는 듯한 인상은 어쩔
수 없다. 아직 이런 노래를 제대로 즐길 짬밥이 안 되는 모양이다.
<울트라맨이야>는 <내 맘이야>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신경쓰지 않고 주관에 몰입하는 그 막장의 분위기가
아주 맘에 든다. 그렇다. 비록 오래 가지는 못할 지라도 웃기도록 미쳐야 하는 것이다. 가사가 어이없게
유치하지만 그래도 미쳐버리자니 이런 가사가 죽도록 좋다. 광기에 대한 미련은 유치함과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비정상은 세평에서 둘 중 한 가지로 분류되지 않는가. "미친" 것이거나 아니면 "유치한" 것.
15주년 음반에서는 원래 6집 음반을 리마스터링하지 않고 리레코딩 버전을 실었는데, 6집의 짧은 연주곡들이
제외된 것이 좀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음질면에서 확실히 오리지날의 것과는 다르니 즐기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 베이스 기타 레코딩은 확실히 미국 뉴메탈 사운드 쪽을 지향한 듯 싶은데, 출시한 지 얼마 안
된 멀쩡한 음반을 자기 욕심대로 리레코딩하여 내겠다는 건 확실히 국내에서 서태지 외에는 달리 할 사람이
없다. 아, 놀라워라!
다만 15주년 음반에서 한 가지 이상한 건, <하여가>와 마찬가지로 <탱크>에서 기타 사운드의 음량이
갑자기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주 짧게 일어나기에 감상에 큰 지장은 없지만,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 의문이다. 이건 6집 리레코딩 음반을 직접 들어보면 그나마 나름 이유가 설명될 듯
싶은데, 그걸 구하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다. -_-
7집
Best - Heffy End
Worst - 10월 4일
정말 흠잡을 데 없는 웰메이드 메탈 음반. 역시 Best는 가장 많이 듣는 <Heffy End>. 팝펑크로서 귀에 쏙쏙
감기는 멜로디와 더불어 지루하지 않게 물 흐르듯 변하며 달리는 연주, 거기에 이 음반 전반을 결정한 레코딩
수준까지 가세하면 게임은 끝. 얼핏 가벼워보이는 팝펑크가 무시무시한 위력을 갖춘 괴물이 되는 과정이다.
웰메이드이지만 그럼에도 형식상 Worst는 뽑혀야 한다. 처음에는 제일 아니꼬운 -_-+ <Watch Out>을
고를까 싶었지만 솔직히 정식으로 음반에 실리지 않은 곡을 찌르는 건 왠지 비겁한 일 같아서 <10월 4일>로
전향했다. 이것도 완성도에 있어 아무런 하자가 없고 그 담담하면서 자연스러운 회상의 분위기에 빠질 수 있는
곡이지만, 역시 다른 곡들에 비해 확 끌리는 포스가 부족하다. -_- 누구는 미친년마냥 일방적인 짝사랑을 쫓아
다니며 내적인 고뇌에 빠지고 누구는 여성에게 비참한 입지를 강요하는 사회를 개탄하며, 또 누구는 자본에
의해 잠식당한 음악계를 비판하는데, 얘는 정물화라도 감상하는양 달콤했던 옛 일이나 회상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담으로 <Watch Out> 역시 큰 무리가 없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곡인데다가 "너의 밤에 날 허락해줘"라는
가사 *-_-* 덕분에 끌리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음질 문제로 유난히 기억되는 곡이다. 이전에 접한 디지털
음원에 비한다면 15주년 음반에서는 확실히 좋은 음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집의 다른 곡들에 비해
사운드의 공간감이 약간 떨어진다. 그래서 잘만 듣는 나한테 괜히 욕 먹는다.
================================================================
지금까지 적당한 리뷰 겸으로 Best & Worst를 짧게 꼽아보았는데,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음반을
그렇게 충분히 소장하고 있지 못한 입장이라 15주년 음반의 내용물에 의지한 바가 크긴 하다. 그런 현실적인
제약이 있었음을 염두하면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작품들 중에서 <내 모든 것> 못지 않은 또다른
의외의 보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 그리고 나의 서태지에 대한 경험과 이해에 기반하여 볼 때, 나에게 있어 서태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일단 뮤지션으로서의 서태지는 댄스 아이돌로부터 시작하여 락 장르를 기반으로 한
밴드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들을 섭렵하고 또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그 경력의 양이나 질 양면으로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더군다나 내가 그의 음악을 좋아하고 즐긴다는 점에 있어서 "대단하다"는 평가는
객관성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솔직한 것이다.
그런 서태지의 전체적인 디스코그래피를 아주 짧게 간단히 표현하자면, 많은 명제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바로 "잘 어울린다"는 게 아닐까. 댄스, 힙합, 메탈 등 온갖 장르를 거쳐
오면서 서태지는 그런 다양한 사운드 요소들과 방법론적 틀을 잘 활용하여 듣기 좋은 음악들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 하나가 아니라 바로 서태지의 음악적 연구와 경험의 축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와 함께 연속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성장의 의미는 그런 경력을 가지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속성의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특별한 건 한국 음악계에서 그런
내적 성장과 함께 대중적 인지도를 높게 쌓아온 인물은 서태지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그건 유독
서태지 혼자 잘나서라기보다는 한국 음악시장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와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서태지가 쌓아온 경력과 그 속에 숨은 노력과 고민들을 결코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실 그가 많은 장르를 거쳐왔으며 또한 외국으로부터 사운드나 방법론적 틀을 모방한다고 해서 음악적
정체성이 없다는 건 그야말로 리스너로서의 자아확대에서 도출된 오만한 단정이다. 음악적 성과물을
분류하는 장르의 개념이 어떻게 어떤 뮤지션의 정체성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개인의 정체성을 이념이나 출신 학교로 규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사실 리스너가 뮤지션의
현재적 정체성에 대해 있다, 없다를 단정짓는 태도부터 얼마나 황당하며 또한 오만한가. 정체성은 결코
짧거나 단순하지 않은 경력에 의해 축적되며 형성되는, 거대하며 복잡한 일련의 내러티브이다.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뮤지션 역시 그 정체성은 그가 행한 음악적 경력에 기반해서 구체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지, 7장의 정규음반을 내놓고 15주년을 맞는 뮤지션에게 음악적 정체성이 있다 없다를 따지는 건 황당한
것이다. 서태지는 엄연히 자신의 음악을 해오며 그 자체적인 음악적 일련성을 일구어왔다. 그건 사실 그대로인
것이다. 그게 바로 뮤지션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반이다. 그런 정체성을 판단하는 게 어디
간단하고 쉬운 일이겠는가?
서태지는 그 인지도에 따라서 엄청난 찬양과 동시에 또다른 수많은 오해와 비난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에
대해 하나하나 따지는 건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사실 개인의 취향 차이를 떠나서 비난의 수준에 오른
이야기들을 접하면 거북하다. 그걸 하나하나 상대하는 건 솔직히 시간 낭비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저
무시하면 그것이 선정성이라는 기반을 타고 재생산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곤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에게 서태지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개인적인 불만을 얘기해보자면야 역시 짧지 않다.
솔직히 인지도라는 측면에서, 대중적인 활동을 하는 서태지에게는 분명히 아이돌적인 측면이 있으며 또 사실
괜시리 뮤지션다운 고고함에 끌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아이돌적인 면모가 좀 아니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서태지팬들이 다른 락 뮤지션들에게 큰 관심이 없거나 혹은 가끔씩 서태지를 필요 이상으로
찬양하는 모습은 나에게 그리 익숙치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좀더 넓게 그리고 아주 상식적이며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건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인물에게 집중되는 수많은 면모 중에서 당연히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속성이며, 그걸 하나하나 따지기 이전에 그 현상 전반을 이해하는 건 객관성 운운 이전에 관점과 취향의
다양성에 대한 개인의 관용에 달린 것이다. 누군가가 서태지를 필요 이상으로 찬양한다고 해서 내 관점에서
비춰지는 서태지 모습의 당위성에 흠집이 생길 우려는 없다. 어차피 뮤지션이나 연예인을 찬양하는 건
개인이 즐기는 차원에서 몰입하며 행하게 되는 자연스런 현상이며, 솔직히 내가 이해하고 좋아하는 서태지의
모습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추구하는 관점의 반영으로서 엄연히 주관적이지 않은가. 물론 그런 주관을 다른
사람과 보다 심도있게 공유하기 위해서는 좀더 구체적이고 객관화된 틀의 대화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면 서태지의 디스코그래피에 경험과 이해는 그 음악적 장르의 나열처럼 다양성에 대한 관용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서태지를 좋아하면서 힙합과 댄스 등의 다양한 장르를 접하게 되었다는 것, 바로
그렇게 다양한 경험이 서태지라는 매개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건 서태지의 이미지와 함께 그 의의를 이루고
있는 한 면모이다. 물론 여전히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기에는 내 관용성이 부족한 게 사실이고 또한 그런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서태지라는 매개가 제시하는 통로에만 의지하게 될 때 그것도 개인이 지니게 되는
일종의 한계가 될 수 있음도 생각해볼만 하다. (사실 나를 비롯해 서태지팬들 중 상당수가 그런 경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소위 "네이처 파운드"를 접했지만 실상 락이나 일렉트로니카 장르에 대해 좀더 넓게 접할
욕구와 적극성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그런 한계의 면모가 반드시 어떤 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Limp Bizkit의 팬이라고
전부 뉴메탈 장르의 팬인 건 아니며, Radiohead 팬은 Radiohead의 음악을 즐기는 데 그쳐도 아무런 하자가
없고 욕 먹을 이유도 없다. 서태지 팬도 그렇고, 또한 서태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걸 추구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또한 그것은 그 자체의 개인적인 영역으로서 보호받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다소 상식적이며 또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 사항 같지만 서태지로부터 배운 중요한
경험적 교훈 중 하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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